할리우드 큰손, 페미니즘 지지하며 상습 성폭력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하비 웨인스타인(사진)이 수십년 간 성폭력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그가 '영화 산업을 혁신한 업계의 권력자'로 페미니즘을 비롯한 진보적 활동을 적극 독려해왔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웨인스타인은 1979년 '미라맥스'를 설립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80년대 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나의 왼발' '시네마천국'으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다. 92년 디즈니에 회사를 매각한 뒤에도 '펄프 픽션'(1994),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 '굿 윌 헌팅'(1997),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등으로 전 세계 영화시장을 쥐락펴락했다. 독립 영화를 주류 영화계로 편입시키고, 이를 수익성 있는 산업으로 키우며 '할리우드의 권력'이 됐다. 스캔들은 지난 5일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시작됐다. 피해 여성 8명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여성들을 호텔로 불러 벌거벗은 채 마사지를 요구하는 등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저질러 왔다. 업계에선 그의 '범죄 행각'을 눈치채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보도가 나온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조차 "그를 오랫동안 알았다. (보도는) 전혀 놀랍지 않다"고 밝혔을 정도다. 그러나 피해 여성들은 그의 우월적 지위와 권력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여배우 애슐리 주드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2015년 잡지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영화계 거물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 있다"고 밝혔지만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NYT 인터뷰에선 "20년 전 업무 협의인 줄 알고 초대 받은 호텔로 갔다가, 샤워가운만 입은 그에게서 '마사지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웨인스타인은 주드에게 자신이 샤워하는 모습을 봐 달라고도 했다. 주드는 "그와 소원해지지 않으면서, 방을 빨리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2014년 임시직으로 고용됐던 에밀리 네스터도 웨인스타인으로부터 "성적 요구에 응하면 경력을 키워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NYT에 따르면 90년 이후 그가 성폭력과 관련, 직원.배우.모델 등 피해 여성과 합의를 본 사례도 최소 8건에 달한다. 영화 '스크림'에 출연한 여배우 로즈 맥고완도 피해를 입었다. 97년 당시 23세였던 그는 '선댄스 영화제 기간 중 호텔 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웨인스타인과 10만달러에 합의했다. 신문은 그의 성범죄가 공식 활동과 완전히 배치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미라맥스 로스앤젤레스' 대표를 지냈던 마크 길은 NYT에 "밖에서 보면 오스카, 성공, 눈부신 문화적 영향력으로 빛났지만, 이면은 엉망진창이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웨인스타인은 그간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행보를 이어왔다. 2015년엔 대학 내 성폭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더 헌팅 그라운드'를 그의 회사가 배급했고, 올 초 선댄스 영화제 중 열린 여성 행진엔 직접 참가했다. 최근엔 러트거스 대학에 페미니즘 운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이름을 딴 강좌가 개설되는 데 기부금을 보탰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여성 권익의 옹호자'로 명망이 높은 여성 변호사 리사 블룸의 이야기도 그가 영화화할 계획이었다. 이번 사건에서 웨인스타인 변호를 맡았던 블룸은 거센 비판 때문에 7일 사임했다. 그는 민주당의 오랜 지지자였으며, 지난 대선 땐 뉴욕 자택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모금 행사를 열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는 각별했다. 지난해엔 오바마의 큰 딸 말리아를 자신의 회사인 '웨인스타인 컴퍼니' 인턴으로 고용했다. NYT는 사설을 통해 "웨인스타인이 진보 인사로 위상을 키우는 동안 여성 피해자도 늘어났다"며 "그의 유력 친구들이 공개적으로 그의 행동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웨인스타인은 NYT 보도 당일 "과거 동료들에게 한 행동이 고통을 야기한 데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치료를 받고 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 휴직에 들어간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7일 웨인스타인 측은 "기사는 거짓되고 명예를 훼손하는 진술로 가득하다"며 NYT를 고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헐크 호건의 섹스 비디오를 공개한 인터넷 매체 '고커'를 파산시킨 찰스 하더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홍주희 기자